개인적으로 저는 "우려내다"라는 단어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이유 하나는 우려 먹는 녹차나 홍차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차(茶)잎을 물 위에 띄어 가만히 담궈 두면, 차안에 들어 있는 각종 성분들이 물 속에 스며 들게 됩니다. 이 광경을 가만히 지켜 보면 봄날의 아지랑이가 대지위로 피어오르듯, 차의 성분들이 물 속 저 안쪽으로 살며시 퍼져 나가는 것 같습니다. 차향이 올라오는 것도 이때입니다. 코끝에 부드럽게 스쳐가는 연기같은 냄새와 물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차의 성분들의 묘한 조화가 먹지도 않은 차의 감칠맛을 불러 일으키고는 합니다. 이 순간이 차를 마시는 기쁨의 첫 번째 단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려내다"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두 번째 이유는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과 닮고 싶은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해내는 말이 "우려내다"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전부가 나의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일부만이라도 나에게로 가져오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향기와 깊은 인격의 맛을 나에게 스며들게 하고 싶습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향기와 깊은 맛을 우려내고, 그리고 그것을 맛보고 싶어 합니다. 이걸 편의상 "인격의 우려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인격을 우려내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존경하고 좋아하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가져와 그 사람과 똑같이 되려고 합니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좋아하는 사람을 닮으려고 하며, 그 사람의 말을 앵무새처럼 흉내내려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좋아 하거나 존경하는 사람 없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자신이 언제나 옳으며, 다른 사람의 향과 맛은 필요 없다고 믿습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인격이나 생각, 심지어는 지식마저도 우려낼 필요가 없다고 믿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의 우러냄 역시, 차의 우러냄과 비슷합니다. 차는 부족하게 우려내면 맛이 나오지 않으며, 너무 과하게 우려내면 쓴 맛이 강해집니다. 인격의 우려냄 역시 과하면 자신의 맛을 잃어 버려 알수 없는 향을 가진 사람이 되고, 부족하게 되면 유치한 독단의 맛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인격의 우려냄은 차의 우려냄과 다르게, 우려내는 시간과 양이 과학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결국 우러내는 시간과 정도의 문제는 취향의 문제가 됩니다. 독단과 독선을 취향의 문제로 바라본다는 사실이 불합리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독단과 독선의 가치관을 가질 때까지 보낸 그 사람의 긴 세월을 생각하면 이 역시 함부러 평가할 것은 아닙니다. 함부러 평가하게 된다면, 그 평가하는 사람 역시 독단과 독선의 비판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입맛에 맞는 맛있는 차를 우려내기 위해 많은 쓴맛과 싱거운 맛을 보아가며 오랜 시간 연구해야 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우려내는 일 역시 오랜기간 연구하고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세월의 도(道)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주제와 상관없는 말을 사족처럼 붙이지면, 우려내는 것과 우려먹는 것은 아주 다른 말입니다. 우려냄을 당하는 것은 기분이 좋지만, 우려먹히는 일은 슬픈 일입니다. 제 주위에 "친구를 우려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려내는 수준이 아니라, 거의 베끼는 수준입니다. 다행이 저와는 친구 수준은 아니어서 그 사람의 우려먹음을 피하고 있습니다만, 경계를 늦출 수는 없습니다. (-.-) 그 사람과 친구가 되는 일은 맛있게 우려낸 차에 식초 세 방울 정도 뿌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