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여자친구에게는 절대 내 자신의 보장자산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었다. 사실, 채 몇 년 다니지도 않고 회사를 뛰어나와 사업을 하겠다며 이리 저리 헤매는 나에게 보장자산 같은 것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돈 있냐고 묻는 여자친구의 질문에 “빚은 없어.”라고 대답해 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진실이었다. 여자친구도 대충 내 재정상태를 짐작했었지만, “인간 로또가 되어 줄께”라고 공약했던 내 미래의 재산가치와 현재의 성실함을 인정해 결혼을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물론 결혼하고 통장 잔고 확인에 나선 직후에는, 너무나 빈약한 재정상태에 ‘너 그 동안 뭐 했니?’ 라고 황당해 했었지만..
여자친구가 나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몸무게만은 아니었다. 나 말고 남자가 하나 있었다. 대학생이던 시절. 언젠가 여자친구의 학교에 불쑥 찾아갔더랬다. 학과 건물
앞에서 깜짝 놀래어줄 생각을 하고 얼쩡거리고 있는데, 옆 모퉁이에서 여자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가운 마음에 살금살금 걸어 가 보니, 한 남자가 무릎을 꿇고 여자친구의 손을 잡고 있었고, 여자친구는 화를 내며 그 손을 뿌리치고 있었다. 굳은 표정을 지으며 종종걸음으로 저 쪽으로 사라진 여자친구와 그 뒤를 애절한 눈으로 쳐다보던 그 남자.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잠깐 그 자리에서 망설이다가 그냥 집으로 되돌아갔었다. 몇 년이 지나 그 이야기를 했더니 여자친구는 당황해 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왜 아무 말 없이 그냥 집에 갔는지, 화를 내지 않았는지 나에게 물었다. “글쎄. 네가 나에게 아무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먼저 말을 하기가 어려웠어. 그리고 내가 모르는 다른 사람이 너를 좋아하고 있다고 해서, 내가 그 사람과 머리끄덩이 잡고 싸울 거야? 어쩔 거야? 그 남자 인상 무섭더라구. 그런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었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이야기 하는 내 모습에 여자친구는 감동 받은 눈치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 줘서 고맙다는 말도 했다. 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지만. 아무렇지 않기는. 개뿔. 그날 밤 마신 소주가 깡으로 세 병이다.
나 역시, 여자친구가 모르는 비밀이 있었다. 아버지 생신에 맞춰 자연스럽게 우리 집에 놀러 온 여자친구는 내가 집을 잠깐 비운 사이 내 방 앨범 박스에서 옛 여자친구들과 주고받았던 편지와 사진 묶음들을 발견해 버렸다. 우리 집에서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던 여자친구는 밖으로 나서자 불같이 화를 냈다. “다 없애 버렸다며? 그런데 저것들은 뭐야?” 그런데 사실. 그것들을 다 없애기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나에게 있어 한 때의 뜨거움이었고, 한 때의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그것들은 그 시간을 기억해주는 추억거리들이고… 없앤다고는 이야기 했었지만, 차마 없애지 못하고 숨겨 왔던 것인데 그걸 여자친구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뭐? 사랑하는 너의 별?” 편지도 조금 읽었나 보다. “내 참. 유치하기는 짝이 없어서. 그 여자가 너의 별이면, 나는 너의 태양이다. 이제 나를 해님으로 불러.” 결혼한 지금까지 아내를 가끔씩 태양의 여자, 혹은 핫녀(HOT女)라고 부르는 것은 그날의 그 사건 때문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고 할지라도 말 못할 비밀은 있게 마련이다. 감추고 싶은 기억들. 혹은 말하기 싫은 부끄러움. 그리고 지켜내고 싶은 자존심 같은 것들은 꺼내어 보여주기가 참으로 쉽지 않다. 그럴 때는 그런 비밀들을 에둘러 덮어주는 것이 훨씬 더 큰 사랑의 실천이 된다. 가끔 연애의 조건으로 “절대 숨기지 않기”를 내세우는 커플들을 보고는 하는데, 이건 위험한 일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내 자신에게도 감추고 싶은 일이 있기 마련인데, 어떻게 다른 이에게 모든 것을 내 보일 수 있겠는가? 비밀까지 사랑하겠다며 감춰 놓은 것을 자백(?)하라고 윽박지르는 커플들을 볼 때마다, 뻥치지 말라는 충고를 해 주고 싶다. 아가페적 사랑을 실천하는 종교인이 아닌 이상에야, 어떻게 묻지마 사랑이 가능하겠는가? 사실은 상대를 믿기 힘들어서 그런 거라고? 그러면 거기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붙이면 안 되지.
우리가 인간인 이상,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게 보이면, 그게 이상한 거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노력하는 자세도 그다지 정상은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만 사랑하기에도 무척이나 힘든 것이 사랑이다. 보이지 않는 비밀 때문에 사랑을 그르치는 커플은 텔레비전에서만 많이 나올 뿐이며, 현실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들 -성격이나 외모, 혹은 돈 - 때문에 더 자주 위태로워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숨기고 싶어 하는 부분은, 숨길 수 있게 해 주는 일. 그것이 더 깊은 배려인 것이고, 더 깊은 존중인 것이다. 우리는 인간답게 눈에 보이는 부분만 사랑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편지를 뒤적거렸던 내 아내. 분명 잘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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