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중반. 초등학교 6학년 정도.. 하여간 어렸을 적. 보물섬이라는 만화 잡지가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부인이셨던 육영수여사가 만든 육영재단에서 발행하던 잡지였다. 두툼한 책에 온갖 종류의 만화가 들어 있었는데, 그 큰 두께만큼이나 알찬내용이 많아, 용돈을 아껴 사서보고는 했었다. 그 책에 실렸던 만화 중에, 뗏목을 타고 세계를 일주하는 내용의 연재만화가 있었다.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말썽꾸러기 친구 몇이서 뗏목을 엮어 세계를 일주하며, 세계 각 나라 사람들과 만나며 겪는 이야기였다.
(이 책은 92년도에 나온 책이다.)
책 표지의 중간에 보면,
고려를 건국하시고, 요즘 다시 발해를 건국하시고 계신 그 분..
그 분의 아내 되시는.. 하희라씨의 어렸을 적 얼굴이 나온다.
만화의 이 아이들은 어느 날, 미국에 표류하게 된다. 여기서 이들은 필리핀에서 망명해 온 “이멜다” 여사를 만나게 된다. 이멜다 여사는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의 아내로, 86년 필리핀의 민중 봉기로 인해, 마르코스가 권좌에서 쫓겨나자, 같이 미국에 망명해서 살고 있었다. 뗏목을 타고 표류하던 이 아이들은 이멜다 여사의 안내를 받으며, 이멜다 여사가 살고 있는 집을 구경하지만, 곧 이멜다 여사의 사치에 입을 벌리고 만다. 벽장에 늘어져 있는 수천 개의 고가 구두와 온 몸에 치렁치렁 달려있던 다이아몬드. 여기에 더해 성 같은 집을 보며, 이 아이들은 더 이상 부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필리핀에서 부정부패로 쫓겨 온 이멜다 여사를 비웃는다. 이멜다 여사는. 이런 아이들의 비웃음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기억이 명확하지 않다보니, 보물섬인지, 어깨동무인지 헤 깔린다. 두 잡지 모두, 육영재단에서 나온 것이니 이건 그냥 넘어가고.…… 만화 제목은 조금 아리까리하다. 검색 해 보니, “두심이의 표류기”일 가능성이 높긴 한데, 이 만화는 소년동아에 연재되었던 것이라고 나온다. 분명, 나는 “보물섬 (어쩌면, 어깨동무)”에서 이 만화를 접했었다. 따라서 이 만화제목이 두심이 표류기 인지에 대해서는 뭐라 말하기 어렵다.
내 기억 속의 이멜다 여사는 이런 이미지였다. 남편인 마르코스가 수십억 달러어치의 부정부패로 재산을 모으고, 이걸 가지고 온갖 사치를 다 부리며, 사이코틱한 성질머리를 드러내는 여자. 머나 먼 한국의 아이들 만화 속에서조차 비웃음을 사는 캐릭터로 그려지는, 세계적인 망신거리 같은 여자. 그런데 몇 년이 지나, 고등학생이 되어 신문을 보다가, 이멜다 여사의 기사를 접하고 어이가 없어졌다. 이멜다 여사가 고국인 필리핀에 가서 “대선”에 출마한 것이었다. “마르코스는 진정 이 나라를 사랑했던 사람이었다.”라는 목소리를 내며.. 마르코스와 이멜다가 대통령궁에 있으며, 공식적으로 해외 계좌로 빼돌린 돈만 미화 50억 달러에, 필리핀 돈 50억 페소였다. 보석이나 알려지지 않는 것들까지 합치면 수백억 달러는 족히 달할 것이라는 마르코스의 부정부패는 잘 나가던 필리핀 경제를 주저앉힐 정도였다. 그래서 민중 봉기로 쫓겨난 것인데. 어처구니가 없게. 고국으로 돌아가 정계복귀를 선언하다니. 코웃음만 날 뿐이었다.
온갖 그림과 호화로운 장식물로 넘쳐난다.. 피카소의 그림까지 있단다..
더 황당했던 것은 92년 대선에서였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거의 순위권에 들며 자칫 잘못했으면(?) 이멜다가 대통령이 될 뻔 한 것이었다. 이멜다가 선전한 것은 필리핀 사람들의 기억을 파고든 “그때가. 참 좋았지.”라는 이멜다의 슬로건 때문이었다나, 어쨌다나. 하여간. 이런 황당하기 그지없는 그 사건을 보며, 필리핀 국민들을 비웃었더랬다. 장난하나? 나라를 망쳐놓고, 20년간 독재짓을 하다가, 결국 참다 참다 못참은 국민들에게 의해 쫓겨난 대통령의 아내를 지지하다니. 더 황당한 것은 그 다음 해에 일어났다. 그의 아들이 대통령의 고향에서 주지사가 된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작은 아들은 하원의원이 된 것이다. 개판이다. 그때 나는, 필리핀 국민들을 향해.. 마음껏 비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말이다. 이런 비웃음.. 그대로 되돌려서 돌아오게 생겼다. 자랑은 아닌데, 우리에게도 독재의 역사가 있었더랬다. 멀지도 않고. 오래된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그때의 잔재가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져 있고, 그때의 아픔 역시 우리에게 고스란히 살아있다. 그런데 말이다. 그때 독재자의 딸이었던 분이, 대선에 출마한단다. 선관위의 감시가 무서워 말은 함부로 못하겠지만, 참.. 어이가 없을 뿐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당당히 가슴에 걸고, 나서는 그 분의 행적을 보며, 가슴이 막막해진다. 뭐냐? 이게? 기가 막힌다. 필리핀의 이멜다가 대선에 출마했을 때, 얼마나 많은 전세계 언론이 비웃었던가? 독재자의 아내가 출마한다고..
그런데 우리 나라 역시, 자신의 독재를 위해 유신에 저항하던 사람들을 수백명씩 죽였던 그분의.. 그 분의 딸이 출마한단다.. 독재를 하기 위해 총칼로 국민을 위협했던 그 분의 따님께서 대선에 나서신단다. 어떤 분들은 그렇게 말하신다. 박대통령은 그래도 뒤에서 빼 먹은 것이 없다고.. 허허..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유신헌법으로 나라를 통짜로 드시려고 했던 분이 구태여 뒤로 빼실 것이 뭐가 있었겠는가? 그냥 앞으로 먹어도 되는 것을. 그래도 딸내미 챙겨주신 장학회의 가격은 현재 수백억이고, 일가친척에게 하사하신 금액들도 역시 천문학적이다. 또 어떤 이들은 그렇게 말하신다. "그 독재는 나라를 위한 독재였다고.." 니미.. 그 말은, 이멜다가 필리핀에서 대선에 출마하며 했던 말이다..
미안하다. 필리핀의 이멜다 여사여. 미안하다. 수준 낮다고, 정치의식 개판이라고 욕했던 필리핀 국민들이여.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려서 우리는 잘난 줄 알았었다. 최소한 우리는 그런 유치한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육영수 여사가 설립하신 육영재단의 만화잡지, 보물섬에서마저 비웃는.. 그런 상황이 우리에게 생길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진심으로 사과한다. 필리핀이여.. 나의 사과를 받아 주시라.. -.-
사랑을 그대 품안에 안았었던 신애라씨 어린 얼굴이 보인다..
그때 많은 사랑을 품에 안아서였을까?
근래엔 가슴으로 아이를 낳으셨다. (아이를 입양하였단다.)
이런 글에 참 생뚱맞지만..
내가 아빠가 되고 보니, 다른 아이를 입양한다는 일이 참 쉬운 일은 아닌 듯 싶다.
참.. 존경스럽다.
아참. 이 글은.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글도 아니고, 반대하는 글도 아니다. 필리핀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쓴 글이다. 진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