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와 커피

다반사와 일다경

곰아재 2006. 9. 11. 10:40
 다반사(茶飯事)

다반사(茶飯事)란 “자주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 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한자의 뜻으로 해석하면 “차茶를 먹거나 밥飯을 먹는 것처럼 흔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전에 자주 썼던 “밥 먹듯이 한다.” 라는 표현은 이 다반사에서 빌려온 것입니다.

여기서 궁금증이 하나 듭니다. 밥이야 늘 먹는 것이기에, 아니 안 먹으면 죽는 것이기에 당연히 자주 하게 되는 행동입니다만, 차는 안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꼭 먹어야 하는 중요한 일도 아닌데 왜 흔한 일을 뜻하는 “다반사”라는 단어에 밥과 함께 포함시켜 놓은 것일까요?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것은 다반사란 단어가 사찰에서 만들어지고 사용되던 불교 용어였기 때문입니다. 다도를 정신 수련의 하나로 생각한 스님들은 밥보다, 차를 더 많이 드셨고, 그래서  밥보다 앞선 위치에 차란 단어를 넣어 다반사란 단어를 만드셔서 사용해 왔었습니다.

그렇다고 일반 백성들이 차를 멀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차를 멀리 했다면 다반사란 단어를 절에서 가지고 속세로 내려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차를 먹는 행위가 일상의 한 범주에 있었기에, 다반사라는 단어가 일반 백성들에게도 스님들과 같은 의미로 사용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반사란 말은 현대에도 자주 쓰이는 단어입니다. 현대에서도 적당히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은 요즘에도 차를 먹고 밥을 먹는 행위가 굉장히 자주 일어나는 일상의 일이란 뜻이겠지요.

가만히 애정을 가지고 그 단어를 들여다보면 “언제나 일어나는 평범한 일상의 일들”을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는 일”로 비유한 옛사람들의 여유로움이 느껴집니다. 물론 먹을 것에 일상을 비유해야 했던 못 먹던 시절의 고단함도 묻어 나오기는 하지만요.




일다경 (一茶頃)

무협지를 자주 읽은 분이거나 고서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차 한 잔 마실 시간“을 뜻하는 일다경 (一茶頃) 이란 단어를 알고 계실 겁다. 그렇지만 일다경이라는 단어를 알고 계시는 분이라 할지라도, 이게 어느 정도의 시간인지 감이 안 잡히실 분이 많을 겁니다. 연구가들에 의하면, 일다경은 대략 15분 정도를 가르킨다고 합니다.

차 한 잔을 15분 동안 먹는다고 한다면 분명 원샷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옛 사람들이 저처럼 커다란 머그컵으로 차를 먹지는 않았을 테니, 예의 손가락 몇 마디 합쳐 놓은 듯한 그 작은 찻잔으로 차를 마셨을 겁니다. 몇 모금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정도의 양을 15분 정도에 걸려 마셨다면 그건 참 느긋하고 여유로운 행위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15분이라는 시간은 정말 짧은 시간입니다. 바쁜 현대인들에게도 짧은 시간이기에, 보다 느긋한 인생을 살았던 옛 사람들에게는 보다 더 짧은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 여유롭게 즐기는 차 한 잔의 의미를 붙여 놓다니,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일다경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바쁜 삶을 여유있게 돌아보라는 큰 의미를 가진 단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오늘날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대략적인 15분”을 뜻하는 일다경의 의미는, 보다 완벽하고 정확한 표현인 “정확한 15분”이라는 단어에게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때 시간을 표현하는 단어에 있어 시(詩)적인 느낌까지 줘가며 시대를 풍미했던 단어였지만, 변해버린 시간의 흐름에 무릎을 꿇고, 현재 현실의 우리들에게 외면을 받아, 무협지와 고전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 단어가 생명을 유지하려면 동시대 사람들의 호응이 있어야 합니다. 오래전 일상 단어였던 다반사와 일다경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선조들이 차를 마시는 일을 일상생활의 범주에 넣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또한 현재 일다경이라는 단어가 사라지는 것은 대강 몇 분 이라는 표현 보다, 정확히 몇 분이라는 표현이 중요시 되는 시대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여유 있게 즐길 수 있는 아주 짧은 시간”이라는 모순의 표현 방법을 이 시대의 날카로운 시대감각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아니, 어쩌면 일다경이 가지고 있는 잠깐의 여유의 의미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이성의 시대가 되어 버린 때문일 수도 있는 것이겠지요.